푹 잔 ** 이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다.긴 속눈썹이 살짝 벌어진 입술, 검은 머리, 복숭아, 꽃잎 같은 두 볼에 키스를 하고 나는 그만 그 예쁜 볼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blog.naver.com 새벽 2시 두 곳에 밤가게 출연, 그리고 내가 운영하는 애마로 장부를 정리해 오면 현준은 늘 나를 기다리고 잠든 모습만 보인다.
눈을 뜰까봐 유리창에 비치는 달빛으로 아이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다
귀여운 아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아들이 5년이라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결혼생활은 참고 견딘 것도 결국 떨리는 손으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모두 아들 때문이다.결혼과 동시에 이민 간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이민간다는 이야기는 정지상태입니다.결혼은 내년초에 한다… blog.naver.com

이제 겨우 2살, 9개월, 나이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
다음에 제 아들이 좀 얌전해지면
난 조용히 얘기해줄게 왜 현준이는 엄마가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현준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때부터 나는 늘 어머니와 단둘이 있던 어린 시절 김순애(본명)는 그저 문에 붙잡혀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던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엄마가 액자 뒤에 넣어둔 채찍으로 때리는 게 두려워 늘 말도 조심스레 돌아다니며 숙제도 열심히 한 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여자 아이, 유난히 노래 부르는 게 즐거웠고 하얀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의 핑크 구두를 신은 발레리나가 꿈이었는데 그건 나 혼자만의 꿈이었다.
얌전히 공부해서 예쁘게 시집가는 것, 그게 무남독녀 외동딸에게 거는 엄마의 유일한 바람이었던 발레는 엄마의 반대로 지도를 받지 못했지만 나는 늘 노래를 불렀다.애틋한 멜로디의 팝송을 흥얼거리며 나의 외로운 사춘기는 지나갔다

단발머리를 휘날리는 여고 시절 나는 처음으로 내 친아버지를 만났다.서툴고 어색한 아버지를 부르며 나는 다시 엄마와 헤어져 아버지 곁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나를 억지로 경기대학교 가정과에 입학시킨 나는 가정학개론을 듣기보다 영어사전을 찾아 팝송 가사를 위해 외우는 것이 즐겁다.
부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19세의 나는 몰래 대학에 휴학계를 내고 말았다.그리고 혼자 미8군 쇼 책임자를 찾았다. 그 당시에는 그곳이 팝송을 부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무대였다.
다소 허스키한 목소리는 인기가 있어 곧 미국 연예단체의 주선으로 레이디버드라는 5인조 여성그룹으로 조직해 외국 순회공연을 떠날 계획이었다.
너무 큰 충격에 말을 잊은 엄마에게 나는 엄마, 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저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행복합니다.절대로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딸이 되지 않겠습니다.” 허참 씨는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상영이다. 1970년 서울에 쉘불이라는 음악다방의 MC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blog.naver.com 지금은 계속 공부를 했더라면 하는 것이 가끔 후회되지만 그때 노래만이 내가 사는 이유라고 믿었던 그룹과 함께 미국 캐나다 동남아시아 등기를 하면서 내 성격은 변한 나머지 말이 없고 소극적이었던 나는 잘 웃고 잘 울고 활발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1972년 7년간의 해외활동을 마치고 올라가자마자 앨범을 입수했다.저는 여름 훈장이라는 곡이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안녕하세요’를 더 좋아했다.
안녕하세요는 의외로 히트를 쳤고 나는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로 몇 번이나 “안녕하세요”라고 불렀다.
웃으면서 얘기해주세요. 마음은 풍선헬로라고,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등 7장의 레코드는 부를 때마다 모두 히트를 치고 라디오로 TV로 무대를 누볐다.
웨이브가 있는 긴 머리를 탈락시키며 유연한 동작으로 춤을 추었고(나는 그때 노래에 감정에 따라 춤을 추지만 따로 연습은 하지 않는다) 노래를 부를 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또 내 노래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리 피곤해도 금방 힘이 났다.남들이 내 특징이라는 두툼한 입술로 열심히 노래할 무렵 나는 가수 이숙의 소개로 전남편을 만났다.(중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