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가수 배호의 일생

독립투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가수 배호의 일생

내가 현대 한국의 많은 가수 중에 첫 손가락 엄지손가락으로 꼽는 사람이 있다. 여가수로는 이미자, 남자 가수로는 배호다. 이 평가는 저 혼자만이 아니라 어르신들로서 트로트 팬이라면 남자나 여자나 거의 동의할 것이다. 오늘로 어느덧 49주기가 되는 배호의 사망일을 다시 맞이하니 2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던 그의 요절이 새삼 아쉽다. 나에게 그의 노래가 항상 애절하게 들리는 심리적 이유다.

나는 원래 젊었을 때부터 노인처럼 배호의 노래를 좋아했다. 생애 두 번째로 취업해 일한 곳이 바로 용산의 삼각지였다. 그곳에는 배호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어 출퇴근길에 오가며 그를 자주 떠올리기도 했다. 자신을 스타덤에 올린 명곡 ‘돌아가는 삼각지’의 첫 소절에 나오는 가사 ‘삼각지로타리에 단단한 비가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속 삼각지로타리는 이 노래가 히트하던 해인 1967년 만들어져 1990년대 중반까지는 남아있던 원형 입체교차로를 말한다.

나도 1978년부터 시작된 서울 생활 때 하숙집이 있던 노량진(나중에 사당동으로 옮김)과 종로를 오가던 버스 안에서 매일같이 봤다. 로터리의 입체 교차로는 1994년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당시를 회상하면 항상 배호가 떠오른다.

그런데 내가 사람들에게 꼭 알리고 싶은 사실이 있다. 대중가수로서의 배호는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이 나와 있기 때문에 그의 노래와 음악성을 굳이 내가 자세히 다루지 않아도 되지만 그가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가슴이 아팠던 인물이고 무엇보다 그의 집이 독립운동 투사의 집이었다는 사실이다.

배호는 키 174cm, 몸무게 65kg으로 늘씬한 몸매로 늘 반듯한 양복을 즐겨 입던 귀공자 타입의 꽃미남형이었지만 잘생긴 얼굴과 눈에 띄는 금테안경에 가려진 그의 삶은 그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그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고통과 애통함으로 엮인 그의 삶을 비춰보고자 한다.

귀공자 같은 이미지를 주는 배호의 얼굴만 봐도 그가 인생의 뒷길에서 얼마나 괴로워하는 삶을 살았을지 확 연상이 되지 않는다.

배호의 아버지 배국민(19121955)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임시정부 광복군(중국 산둥 성에 본부를 둔 제3지대) 요원이었다. 1942년 4월 24일 배호는 아버지와 신의주 출신의 어머니 김금순(1918~1995) 사이에 장남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아예 배호가 아니었다. 태어나서는 “만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가 태어난 곳도 일제 치하의 한국이 아니라 중국 산둥 성 제도의 지난이었다. 배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위해 중화민국 국적을 갖고 있었으나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부모를 따라 귀국한 뒤 1948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배호의 큰아버지 배경진(19101948)도 광복군이던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배호의 형제들은 일찍 죽었고, 나중에 11살 어린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 혼자 자랐다. 동생 배청금은 유아 때 사망했고 1953년 태어난 여동생 배명신도 2003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에 장수하지 못한 셈이다.

장남으로 태어난 배호도 그 시절 다른 많은 독립투사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며 자랐다. 광복 후 중국에서 귀국한 그의 부모는 인천의 한 수용소에서 생활하다 1946년 4월부터 서울 창신동 일제강점기 가옥에 살았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귀국한 어린 배만금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부모를 따라 부산으로 가서 피난 생활을 하기도 했다.

휴전 후 다시 서울로 상경한 배호는 1955년 서울창신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그해 8월 21일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족을 따라 다시 부산으로 내려 모자원에서 지냈다. 배호는 삼성중학교에 입학해 1학년 때 배정은으로 개명했고 2학년 때인 1956년 중퇴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중학교 중퇴 후에도 빈곤에 시달리다 서울로 올라온 배호는 중국 과거 대학 음악과 출신으로 작곡가이자 MBC 문화방송 초대 악단장을 지낸 넷째 삼촌인 김광빈의 수하로 드럼을 배우고 대중음악을 시작했으며 김광빈 악단의 드럼 연주자로 미 8군 무대와 방송국 등에서 활동했다. 배호는 12인조 ‘배호와 그 악단’ 밴드를 결성하고 서울 종로 낙원동 프린스 카바레(cabaret) 등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배호와 그 악단’ 안경을 쓰고 드럼을 연주하는 사람이 배호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배호는 메이지대 문예과 출신 바이올린 주자로 서울중앙방송(KBS 전신) 악단장과 1964년부터 이듬해까지 TBC 동양방송 악단장을 지낸 셋째 삼촌 김광수, 그리고 넷째 삼촌 김광빈 악단, 동화, 천지, MBC 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배호의 외가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둘째 딸인 김광옥도 일본에서 음대를 졸업한 뒤 유명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배호의 삼촌 김광빈은 자신의 개인 작곡집을 낼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있었다.

이처럼 네 삼촌 중 세 명이 음악 전문가였다는 사실을 보면 배호의 음악적 재능은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는 것이 학교에 다닌 것은 중학교 중퇴뿐 음악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악보를 잘 읽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만 듣고도 금방 연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배호가 가수로 데뷔한 것은 ‘굿바이’를 부르며 데뷔한 1963년 21세 때였고, 이 곡에 이어 곧바로 ‘사랑의 화살’도 발표되었는데, 본격적인 가수 생활에 들어간 것은 그 이듬해 22세인 1964년 ‘두매산골’과 ‘굿바이’로 앨범을 내고 나서였다.

그의 목소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쉽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데뷔 앨범으로 발매된 ‘두메산골’은 ‘도라지’라는 말을 외국어처럼 살짝 굴리는 게 정말 독특했다. 배호 자신도 “제 창법이 ‘정말 건방지게 멋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반대로 기성 대중음악계의 실력도 없지 않았다. 그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일보 정홍택이라는 기자는 배호의 노래를 ‘깡패의 노래’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배호는 잠시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어쨌든 넷째 삼촌 김광빈이 지어준 배호(虎 とにかく)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고, 그가 안경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드럼을 배워 드러머 생활이 시작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데 1966년 배호에게 시련이 닥쳤다. 뜻밖에 신장염이 발병한 것이다. 치료 환경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의료기술이나 약이 요즘처럼 발달한 시대가 아니어서 쉽게 낫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배호는 쉬지 않고 신곡을 냈다. 그에게 노래는 생명과 같았고 인생의 전부였다. 하지만 지병은 더 심해졌고 몸 상태는 갈수록 악화됐다. 신장염이 발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그는 ‘황금눈'(지구레코드), ‘홍콩 66번지'(신세기레코드) 두 곡을 더 넣었다.

이듬해 1967년 3월 장충동 녹음실에서 취입했을 때는 한 구절을 부르고 주저앉았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해 25세에 그가 병상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 신곡이 바로 배상태가 작곡한 불세출의 돌아가는 삼각지(아세아 전속)였다. 이 곡을 작곡한 배상태가 이 노래를 부를 마땅한 가수를 몇 년 동안 찾아도 찾지 못하자 병상에 누워 있던 배호를 찾아가 사양하던 그를 설득해 병상에서 부르게 됐다는 가슴 아픈 뒷이야기가 있다.

그런 만큼 이 노래는 앨범이 무려 20만장이나 팔리며 대박을 터뜨리면서 배호를 톱 가수 반열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음악 차트 사상 드물게 20주 연속 1위를 기록한 그의 대표곡이다. 나도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곤 하지만 그 애틋함과 허무감은 절절히 가슴에 사무치는 곡이다.

배호는 가수 사상 드물게 첫 히트곡 1위에 오른 뒤 4개월 만에 MBC 방송 10대 가수로 선정됐다. ‘돌아가는 삼각지’ 외에도 ‘누가 울어’,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등이 연이어 히트했고, 배호는 20대 중반의 젊은 1967년 방송사가 수여하는 가수상을 휩쓸었다.

돌이켜보면 1967년부터 1968년, 즉 25세에서 26세 2년간이 가수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시대를 보낸 셈이다. 여러 매체가 주최한 가요행사에서 가수상도 수상했고 MBC 10대 가수 외에도 TBC방송 가요대상도 수상해 치솟는 인기에 힘입어 각종 영화에도 출연했기 때문이다.

안개 낀 장충단공원 노래가 히트할 무렵 장충단공원을 걷고 있는 배호.

1971년 10월 배호는 라디오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 출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비를 맞고 감기에 걸려 그만 신장염이 재발하여 병원에 재입원하였다. 병세는 악화됐지만 그는 병상에 누워도 노래를 들이마셨다. 그렇게 태어난 노래가 ‘자정의 이별’과 ‘마지막 잎사귀’ 두 곡이다. 헐떡이는 숨결과 끓는 가래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마지막 노래였다. 야만적인 시대라 그런지 ‘영시의 이별’은 통행금지 시간에 이별을 하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처한 삶의 고통과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까. 배호가 부른 노래는 특히 이별, 고독, 비통한 슬픔, 배신, 또 이를 나타내기 위해 비, 안개, 낙엽, 파도 등 외롭고 외로운 이미지들이 가사로 많이 나온다. 그가 부른 총 200여 곡의 노래 중 비가 오는 가사가 나오는 것은 31곡, 안개가 낀 노래가 13곡이나 된다고 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의 주위를 맴돌더라도 배호는 노래를 위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노래가 있었기에 인생의 리비도가 불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휠체어에 의지하면서까지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의 음악 세계를 위한 고독한 투혼이었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 음악만 틀어놓고 그냥 무대에 우뚝 서서 내려오기도 했는데, 그는 “죽어도 노래하고 죽는다”며 공연 출연도 중단하지 않았다.

1971년 7월 어느 날 배호는 녹음실에서 건네받은 가사를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비장한 각오로 마이크를 잡고 신곡을 불렀다. 마지막 잎사귀였다. 그가 부른 노래 가사에는 ‘안녕’, ‘마지막’, ‘이별’ 등의 단어가 유난히 많듯이 ‘마지막 잎’ 가사에도 말 그대로 이 가사가 나온다. ‘마지막 잎사귀’는 어쩌면 한발 죽음이 다가온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부른 노래일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이 노래가 유작이 됨에 따라 ‘마지막 잎사귀’는 결국 배호 자신을 이야기한 셈이다.

근대 미국 소설가 오 헨리(O. Henry, 1862~1910)가 1905년 발표한 인도주의적 단편소설 제목도 마지막 잎이다. 폐렴으로 죽음을 앞둔 소녀의 절망적인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한 무명화가가 병상에 있던 소녀를 위한 희생적인 사랑이 주제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배호에게 오헨리의 소설처럼 가슴이 막힐 정도로 슬픈 일이 벌어진다. 그가 입원해 있던 병상 옆에는 1년 동안 떨어지지 않고 간호해준 7살 연하의 가슴 아픈 사연의 주인공이 되는 여성이 있었다. 배호보다 일곱 살 어렸으므로 1949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22세였다. 그는 대구 공연 때 배호의 팬으로 만나 배호와 장래까지 약속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숨을 거두기 전날 배호는 그날도 병상 담당으로 자신의 곁을 지켜준 그녀에게 자신의 손목시계와 반지를 건네며 자신을 떠나라고 했다. 배호는 필사적으로 “안 가겠다”고 울부짖던 그녀를 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참으며 설득해 눈물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당시 두 사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장의 아픔! 문예에 약한 나로서는 달리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다. 만약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은 약 70세 초반일 것이다. 어딘가에서 지금도 배호의 노래를 들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을 때까지는 어떻게 그의 가슴 아픈 연인 배호를 잊을 수 있을까.

하늘이 낳은 불세출 가수 배호는 그 해를 넘기지 못했다. 1971년 11월 7일 배호는 결국 운명했다. 그의 나이는 만 29세에 미혼이었다. 그가 가수로 활동한 기간은 15세가 되던 1957년부터 29세가 되던 1971년까지 14년이었는데, 지난 14년 중 그가 본격적인 가수 생활을 한 것은 9년뿐이었다. 나머지 5년은 드럼을 치는 콤보밴드 배호와 그 악단 생활을 한 것이다.

찰나와 같은 지난 9년 동안 그는 10여 개의 음반사에서 20여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길지 않은 그 기간에 200여 곡을 남긴 열정과 투혼의 삶을 살았던 한국 최고의 가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내 주관적 판단이지만 한 세기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한 불후의 명가수였다.

수많은 그의 팬들은 물론 가요계의 다른 가수들도 배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평소 배호의 목소리가 좋아 그의 노래를 자주 듣던 김세레나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며 그를 일찍 데려간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누구보다 배호의 어머니가 유난히 슬퍼했다. 병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배호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제 노래 이상해요. 건강할 때는 히트를 치지 않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불어 넣은 노래가 히트를 치는 거예요. 효도를 못해서…”

이처럼 효자였으니 그런 아이를 먼저, 그것도 심한 병으로 배웅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상실의 아픔은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 같다. 아들 하나를 보며 유일한 즐거움으로 살아온 그였기에 슬픔은 모든 것을 잃은 듯 심했다. 어머니는 1995년 9월 9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일설에는 아들을 잃은 뒤 그 후유증으로 정신병 증세도 있었다고 한다.

인터넷에 올라온 배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일단 생김새로 봤을 때는 배호의 삼촌과 흡사하고 배호와도 많이 닮았다. 대체로 30대 후반, 40대 초반 때의 모습 같지만 아래 사진의 배호 엄마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배호의 어머니와 여동생

11월 11일 서울예총회관에서 열린 배호의 장례식에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일이 벌어졌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배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젊은 여성들이 상복을 입고 고인을 기리기 위해 수백 미터나 줄을 선 것이다.

이 진귀한 광경은 배호의 이른 세상을 안타까워한 그의 팬들의 애틋한 마음이 집단적으로 반영된 것은 물론이지만, 아마도 여기에 배호의 죽음이 있기 3년 전 그와 동시대 인기가수 차준락(1942~1968)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뇌막염으로 먼저 조세한 바 있어 대중가요 팬들의 슬픔이 더해져 일어나지 않았나 싶다.

누가 이 많은 조선의 많은 여성들을 울렸는가. 저마다 통곡하거나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거나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지 않는 사람은 없다. 망자를 향한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이 많은 팬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모두 슬픔, 애통함, 비통함으로 귀일한다. 슬픔 속에서, 오열 속에서, 슬픔 속에서 명복을 비는 마음도 하나가 됐을 것이다.

배호는 경기 양주시 장흥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됐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꼭 10년이 지난 1981년 실시된 MBC 특집 여론조사에서 배호는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에 선정됐고, 2003년 10월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이 추서된 데 이어 2005년 6월 ‘광복 60주년 기념 KBS 가요무대’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은 국민 가수 10인’에 선정됐다.

작년까지는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기리는 장충단 배호가.축제도 매년 열렸다. 이처럼 배호는 살아도 그랬지만 죽고 더 긴 생명력을 갖고 한국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국민 가수다. 조금 앙상블이 맞지 않는 비교지만 ‘서양에는 베토벤, 동양에는 베호’라고 불렸을 정도로 음악성과 사후 인기가 죽지 않는, 말 그대로 불후의 가수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배호 음택에서 바라보는 전경

잠자코 잠든 고 배신웅의 유택 2003년 10월 정부가 대중가요 발전에 끼친 업적을 기리며 그에게 옥관문화훈장을 추서훈했지만 훈장도 살아야 제 빛이 나게 마련이다.

현재 서울 삼각지에는 배호의 대표곡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 배호길, 배호 동상 등 그의 기념물이 있다. 그의 노래비는 전국에 총 4곳에 세워져 있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의 ‘돌아가는 삼각지’ 외에 그의 묘역에 ‘두매산골’이 있고, 경주시에 ‘마지막 잎’과 강릉시에 ‘파도’가 일고 있다.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회랑에 마련된 배호 기념 공간. 벽에 걸린 그림 속 원형 교차로가 당시 삼각지로타리의 모습 그대로다.

배호가 떠난 지 올해로 49년!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그렇지 않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국 각지의 노래방에서는 배호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의 육성은 아직도 내 영혼과 함께 한다. 그가 운명을 바꾼 오늘도 나 혼자 돌고 있는 LP 앨범처럼 영혼을 긁는 배호에 대한 추상은 멈추지 않는다. 죽기 전 노래하고 흡입해놓고도 정식으로 발표하지 못한 미발표곡 ‘밤안개 속의 사랑’, ‘지금은 안 가고 있다’, ‘비린내 나는 부두’가 그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그의 요절을 안타깝게 하는 나도 그의 팬 중 한 명으로 ‘밤안개 속의 사랑’을 조용히 불러본다. 불길처럼 살아간 그를 깊이 추모하는 마음으로……아마도 이 노래 가사 중 ‘깨진 사랑에 가슴 아파 허둥지둥 걷는’ 자는 죽기 전날 눈물로 보낸 연인과의 이별을 예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는 사랑’을 가슴 아프게 했던 배호 자신이 아니었을까.

죽기 직전 “나는 죽어도 끝까지 노래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듯이 배호는 지금도 천상에서 구성적으로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https://m.blog.naver.com/bgb1234/222107905801

고즈넉한 안개 속을 헤매는 이 밤 깨진 사랑에 가슴 아프고 애처롭게 걷는 이 다리, 아픈 가슴을 잊을 수 없는 가을…m. blog.naver.com 2014.11.15 삼각지 배호가비 앞에서 초고 2020.11.7.08:09 북한산 노래비에서 가필.

error: Content is protected !!